無題

2019. 11. 27. 21:13

남을 평가하지 말자. 요즘 거듭 되뇌는 생각이다. 타고나길 남에게 무관심한 성격이고 인간관계도 좁아 누군가를 평가하고 말고 할 것도 없지만, 그 좁은 관계 안에서라도 지양하려 한다. 일상에서 습관처럼 내뱉는 사소한 말들을 고치는 것이 제일 어렵지만 신경 쓰다 보면 타인에 대한 평가 자체를 하지 않는 날도 올 것이다. 남을 이해하려 들기보단 내가 수용할 수 있는 부분은 받아들이고 그렇지 못한 부분은 그러려니 하는 마음으로 부드럽게 넘기는 연습도 하고 있다. 어차피 인간은 타인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자 오만이다. 타인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다름을 인정하고 다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이 타인이 타인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배려라고 생각한다. 요즘 부쩍 이런 생각들이 드는 걸 보면 나도 조금은 둥그런 사람이 돼 가고 있는 모양이다. 예전의 내가 뾰족한 가시를 백 개쯤 세우고 살았다면 지금은 그 반 정도로 줄어든 느낌이다. 그건 포기를 배웠기 때문이기도 하고 기대를 버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지금 내 속이 시끄럽지 않은 건 아니지만 매일 같이 널뛰던 예전보단 평화로워졌음이 확실하다.


얼마나 많은 여성이 죽어 나가야 그들의 속이 시원해질까? 여성을 죽음으로 내모는 그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자신들의 발밑에 바짝 엎드려 순종하며 노예의 삶을 사는 것일까? 이미 많은 여성이 남성의 가스라이팅으로 생각하는 힘을 잃고 현대판 노예로 살고 있는데 그것으론 만족할 수 없는 모양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여성을 자신의 발밑에 두어야 직성이 풀리려나 보다. 애초에 여성을 동등한 인간이 아닌 물건으로 보는 그들에게 이런 의문을 품은들 무슨 소용이 있나 싶다. 남성을 향한 여성의 짝사랑이 끝나지 않는 한 앞으로도 여성은 끊임없이 희생될 것이다. 끊을 수 없는 악순환의 반복이다. 지금 읽고 있는 소설 <천 개의 찬란한 태양> 앞 부분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내 딸아, 이제 이걸 알아야 한다. 잘 기억해둬라. 북쪽을 가리키는 나침반 바늘처럼, 남자는 언제나 여자를 향해 손가락질을 한단다. 언제나 말이다. 그걸 명심해라, 마리암." 주인공 마리암 뿐만 아니라 모든 여성이 명심해야 할 문장이 아닐까. 지금 당신의 손가락은 누굴 향해 있는가?


몇 년 전인가 자주 가던 커뮤에서 죽고 싶단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대부분이란 사실을 알고 놀란 적이 있다. 알고는 있었지만 내가 우울한 인간이라는 걸 확인 사살 받은 기분이었달까. 그 이후 '나는 왜 우울한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그 끝에 내린 결론은 타고난 우울 기질의 영향이 가장 크며 후천적 환경 요인까지 더해져 지금의 내가 완성됐다는 거다. 환경 요인이 없었어도 나는 분명 우울한 인간이었을 테지만 지금보단 나은 인간이었을지도 모른다. 환경 요인이 어느 정도 사라진 십여 년 전 즈음을 기점으로 내 안을 채우고 있던 우울 대부분은 저 밑바닥으로 가라앉았다. 하지만 여전히 바닥까지 흔들리는 날엔 우울은 수면까지 떠올라 부유한다. 그래도 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젠 우울이란 녀석을 외면하지 않고 다독이며 함께 사는 방법을 조금은 터득했다는 것이다. 남과 비교하지 않고, 내 몸과 주변을 항상 깨끗이 하고, 맛있는 것을 먹고, 재밌는 책과 영상을 보고, 좋아하는 연예인을 보며 웃기도 하고, 음악을 듣고, 가끔 친구를 만나고, 매일 안아달라 조르는 귀여운 조카를 꼬옥 껴안아 주는 것. 이런 작고 평범한 일들 덕분에 오늘도 우울에 잠식되지 않고 내 삶에 하루를 더 한다. 여전히 사는 건 재미 없고 인간불신에 믿을 건 나 자신과 내 돈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비관적 현실주의자이지만 이런 나를 인정하고 사니 마음은 훨씬 편하다. 어릴 때부터 내 소원은 마음 편히 사는 것 하나였는데 너무 어려운 소원을 빌었나 보다. 조용히 살다 조용히 가서 다시는 무엇으로도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삶은 고통이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이 시작이었을까 심윤경 소설 <설이>가 시작이었을까. 분명 시작은 둘 중 하나였다. 이후로 보는 드라마마다 읽는 소설마다 작정한 듯 나를 울렸다. 울라고 만든 <동백꽃 필 무렵>은 그렇다 쳐도 아니 왜 <천리마 마트>를 보면서 우는데. 뜬금없이 웃기던 병맛 드라마가 뜬금없이 나를 울렸고, 내내 욕하면서 보던 <어하루>는 단오와 경이의 화해 장면 하나로 내 눈물샘을 탈탈 털어갔다. 이젠 끝인가 하고 안심한 순간 정유정의 <진이, 지니>가 마지막 한 방을 거하게 날렸으니. 사육사와 보노보 그리고 백수 노숙자의 이야기가 그리 슬플 줄 나는 몰랐다. 최근 나를 급습한 일련의 눈물파티 진행 상황은 이러했고 지금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이제 눈물파티는 끝내고 웃음파티가 시작됐으면 좋겠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지옥에서 살고 있으니 서로에게 친절하자" 출처는 알 수 없지만 요즘 매우 공감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