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독후감

2019. 12. 15. 21:25

01. 베어타운 / 프레드릭 배크만 / 다산책방 / E

"3월 말의 어느 날, 야밤에 십 대 청소년이 누군가의 이마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이것은 어쩌다 그런 사건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소설의 첫 문장은 이렇다. 첫 문장만 읽고 살인 사건 이야기인가 싶었다. 하지만 읽어 나갈수록 생소한 아이스하키 이야기와 마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만 나와서 지루했고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어 답답하기도 했다. 베어타운의 청소년 아이스하키팀이 전국 우승을 해서 쇠락해가는 마을의 경제를 살리는 내용인가라는 어이없는 상상도 해보았다. 참을성 없는 독자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을 때 즈음 작가가 미리 심어 놓은 폭탄이 터진다.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어떤 사건인지 쓰진 못하지만 사건 이후로 소설의 분위기는 크게 달라진다. 소설뿐만 아니라 글을 읽는 내 마음가짐도 함께 달라진다. 왜 작가가 초반에 그렇게 마을 사람들 한 명 한 명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는지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이 이야기는 특정 개인이 아닌 마을 사람 모두의 이야기였다. 외면하고 싶지만 외면할 수 없고 외면해서도 안 되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 후반부는 무거운 돌덩이 하나 얹은 듯 답답한 마음으로 읽었는데 그 마지막에 만난 것이 희망이어서 다행이었다. 현실이었다면 더 비참한 결말이었을 거란 걸 알기 때문에 소설에서라도 희망을 보고 싶었나 보다. 무겁고 아픈 이야기였지만 현실을 제대로 직시할 줄 아는 작가의 시선이 좋았다. 프레드릭 베크만은 남성 작가인데도 젠더 감수성이 뛰어나 이 부분에선 거슬리는 점이 전혀 없음이 마음에 든다. 마지막 부분을 읽으면서 후속작이 나오겠구나 싶었는데 웬걸 이미 나와 있었다. 나중에 후속작도 읽어봐야겠다.


02. 잠옷을 입으렴 / 이도우 / 위즈덤하우스

오랜만에 나온 신작을 순식간에 읽고 작가님 책 중에 놓친 게 있나 싶어 검색했더니 안 읽어 본 책이 있어 주문했다. 이도우 작가는 로맨스 소설로 유명하지만 이 소설은 로맨스가 아닌 두 소녀의 우정 이야기이자 성장 소설이다. 11살 소녀 '둘녕'은 엄마가 갑자기 집을 나간 후 모암마을 외할머니 집에 맡겨진다. 둘녕은 그곳에서 자신과 나이가 같은 사촌 '수안'을 만난다. 두 소녀는 처음엔 서먹했지만 작은 사건을 계기로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단짝이 된다. 밤에 쉽게 잠들지 못하고 배앓이를 자주 하는 수안은 둘녕을 만난 후로 편안한 밤을 보내게 되고 길눈이 어두운 둘녕에겐 수안이 나침반이 되어 준다. 내가 둘녕이었던 것 마냥, 수안이었던 것 마냥, 지나간 유년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아련하고 그리운 느낌의 소설이었다. 작가님은 로맨스 소설만 잘 쓰시는 줄 알았더니 그냥 글 자체를 잘 쓰시는 분이었다. 여성 작가가 쓴 여성 성장 소설은 언제나 옳다.


03. 신문물 검역소 / 강지영 / 네오픽션 / E

이 소설은 작년에 읽었는데 독후감을 안 써서 안 읽은 줄 알고 또 읽을뻔한 소설이라 뒤늦게 독후감을 남긴다. 주인공 '함복배'는 태어날 때도 울지 않았고 열 살이 될 때까지 말을 안 해서 다들 벙어리로 알고 대했으나 사실 그는 벙어리가 아니었다. 울기 싫어서 울지 않았고 할 말이 없어서 하지 않았을 뿐이다. 아무리 할 말이 없어도 그렇지 열 살이 될 동안 부모한테까지 말 한마디 하지 않은 건 복배의 잘못이 크다. 세월은 흘러 한양으로 과거시험을 보러 간 스무 살 함복배는 시험 시작 전 극심한 요의를 느껴 처음 본 선비에게 짐을 맡기고 급한 일을 해결한다. 하지만 다시 자리로 돌아와 보니 선비에게 맡긴 짐은 진흙에 나뒹굴고 있고 좋은 자리는 뺏긴 뒤다. 뒤쪽 구석에 간신히 자리를 잡고 시험을 치른 후 과거에 급제하긴 했으나 제 실력을 발휘 못 한 함복배에게 돌아온 자리는 제주에 새로 생긴 신문물 검역소라는 임시기관의 소장이었다.

신문물 검역소란 왜국 사신이 임금에게 진상한 신문물의 용처를 파악해 보고문을 작성하여 올리는 임시 기관이다. 브래지어를 서양인의 관모로 착각해 자랑스럽게 머리에 쓰고 다니는 못 말리는 복배와 그런 그에게 충성을 바치는 조수 한섭과 영보까지 합세하니 오합지졸 트리오 완성이다. 하지만 신문물 검역소에도 해 뜰 날이 도래하니! 배가 난파되어 제주에서 머물게 된 파란 눈의 선비 박연 덕분에 신문물의 용도를 제대로 파악하기 시작한다. 브래지어를 시작으로 여러 신문물의 용도를 추측하는데 하나같이 엉뚱하고 나쁜 쪽으로 기발하여 웃음을 자아낸다. 계속 신문물만 나오면 심심했을 텐데 중반부터 연쇄 살인범을 등장시켜 이야기에 긴장감을 더하고 있다. 기분 전환용으로 가볍게 웃으며 읽을 수 있는 소설이었다.


04. 야차 / 정혜 / 가하 / E

이북리더기를 사고 초반에 헐값으로 로맨스 소설을 많이 들였는데 그중에 하나를 꺼내 봤다. 로맨스 소설은 뭔가를 읽고 싶은데 복잡한 건 싫을 때 읽으면 딱이다. 인간의 정기를 먹고사는 신 '여희'와 형제 열둘을 베고 왕이 된 단국의 황태자 '백영'의 이야기. 판타지 시대물이며 여주가 사람이 아닌 인간사에 무심한 신이라는 설정이 가장 큰 매력인 소설이었다. 냉혈한이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여희에겐 맹목적인 사랑을 바치는 백영과 인간에겐 무관심하지만 백영에겐 끌림을 느끼는 여희. 여주가 신이어서 그런지 남주에게 목매지 않고 오히려 하대하는 모습이 신선했고 (너무 착하고 사랑꾼인 여주는 매력 없음) 여주와 남주가 함께 신들의 세계에 들르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 부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05. 청랑 / 이금조 / 에피루스 / E

이야기의 배경은 고구려 건국 이후 가장 세력 확장이 왕성했던 태왕 시대. 가슴속에 칼날 같은 복수심을 품은 채 살아온 아름다운 조의마루 '선후'와 아버지의 외면 속에서 자라 사랑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여인 '아라'의 고구마 100개쯤 먹은 듯한 사랑 이야기다. 이 소설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원수의 딸을 사랑하게 됐네'가 되겠다. 사내자식이 복수심에 사로잡혀 여자 괴롭히다가 나중에 후회남이 되는 내용인데 결론적으로 해피엔딩이긴 하지만 남주도 짜증 났고 순수하다 못해 바보 같은 여주도 별로였다. 고모인지 이모인지한테 매번 당하면서 매번 믿는 거 보고 진짜 속이는 사람도 문제지만 너도 너다 싶었다. 시대물 중에서 추천이 많아서 사놨던 건데 글을 잘 쓰는 것도 모르겠고 내용도 취향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