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독후감

2020. 1. 9. 20:17

01. 거미여인의 키스 / 마누엘 푸익 / 민음사

게릴라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수감 중인 냉정한 정치범 '발렌틴'과 미성년 보호법 위반으로 구속 수감 중인 감정적인 동성애자 '몰리나'가 소설의 주인공이다. 본문은 교도소 같은 방에 수감 중인 두 남자의 대화체로 구성되어 있다. 두 사람은 무료한 교도소 안에서 시간 보내기 용으로 영화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그렇게 이어진 대화로 인해 점차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게 된다. 사실 몰리나는 정치범 발렌틴에게 정보를 캐내고자 교도소장이 몰래 같은 방으로 잠입시킨 죄수였는데 그는 끝까지 발렌틴을 배신하지 않는다. 이 소설은 영화, 뮤지컬, 연극 등 여러 장르로 만들어져 성공을 거뒀다고 한다. 인터넷 서점 서평을 봐도 호평 일색이던데 나와는 맞지 않는 소설이었다. 까만 것은 글씨, 흰 것은 종이, 읽긴 읽었으나 책장을 덮을 때까지 무슨 소린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전에 마르케스 소설도 이런 식이었는데 이 정도면 라틴 아메리카 문학은 나와 안 맞는 것으로 결론을 내려야겠다. 내게는 환상 문학이 아니라 환장 문학이다.



02. R선생님의 간식 / 쿠모타 하루코, 후쿠다 리카 / 아르테팝

만화가와 간식 연구가의 컬래버레이션 작품으로 그림체가 마음에 들어서 충동 구매한 책이다. 이북도 있었지만, 이북은 흑백이라 의미가 없으니 종이책으로 구매. 막상 받아보니 생각보다 너무 얇아서 실망이었지만 올컬러인 만화도 마음에 들고 생전 처음 들어보는 간식 만드는 법도 흥미로웠다. 간식이다 보니 아무래도 베이킹이 주를 이루는데 예뻐서 먹기 아까운 것들이 잔뜩이었다. 25가지 간식 중에 제일 예뻤던 건 '장미 컵케이크 리스'였고, 제일 먹어보고 싶었던 건 '뿌리채소 찜과 카레 딥'이었다. 이건 간식이라기보단 가벼운 식사 느낌이었는데 잘 익은 색색의 뿌리채소를 카레 딥 소스에 찍어 먹으면 환상~ 이겠지. 이렇게 맛있어 보이지만 만들기 번거로운 음식을 볼 때마다 전용 요리 로봇이 있었으면 좋겠단 생각을 한다. 재료만 사다 주면 알아서 뚝딱뚝딱 만들어서 대령해주면 좋을 텐데. 아직은 꿈만 같은 이야기다. 굳이 살 필요까진 없는 책이었지만 예쁜 그림과 음식으로 잠시나마 위안을 얻었으니 그걸로 만족해야겠다.



03. 너와 함께라면 인생도 여행이다 / 나태주 / 열림원

글 읽는 걸 좋아하지만 '詩'와는 여태껏 친해지지 못했다. 시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데 나만 혼자 낯을 가리며 어려워하는 중이다. '풀꽃'이라는 시로 유명한 나태주 시인. 그나마 이름이 낯익은 시인이기도 하고 표지도 예쁘고 (접힌 표지를 펼치면 커다란 그림이 나온다) 시인의 등단 50주년 기념 시집이라기에 동네 서점에 들렀을 때 사봤다. 세련된 이름 때문인지 젊은 시인인 줄로만 알았는데 등단 50주년이라니! 그럼 연세가 몇이신 건가 싶어서 찾아봤는데 일흔이 넘으신 분이었다. 50년 동안 시를 쓰셨으니 시가 인생이고 인생이 시가 아닐까. 50주년 기념 시집인 만큼 본문엔 신작 시 100편, 독자들이 사랑하는 시 49편, 나태주 시인이 사랑하는 시 65편 총 214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여전히 시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삶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때 묻지 않은 시인의 마음이 고스란히 시에 녹아있음은 느낄 수 있었다. 나에게 시는 어둡고 우울한 이미지가 강했었는데 나태주 시인의 시는 대부분 밝고 긍정적이어서 읽는 내내 마음이 평온했다.



04. 체리토마토파이 / 베로니크 드 뷔르 / 청미

와! 이 책이 소설이라는 걸 독후감을 쓰는 지금 알았다. 지금까지 프랑스 시골에 사는 '잔' 할머니가 일 년 동안 쓴 일기를 모아 출간한 책인 줄 알았는데 소설이었다니!!! 그럼 이렇게 실감 나는 아흔 살의 일상을 써 내려간 작가의 나이는 몇인 걸까? 궁금하다 궁금해. 실화로 깜빡 속아 넘어간 이 소설은 시골 마을에 홀로 사는 아흔 살 잔 할머니가 봄부터 여름, 가을, 겨울까지 사계절 동안 쓴 일기를 모은 책이다. 노년의 일상이 어떤 식인지 꽤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글로 제목으로 쓰인 '체리토마토파이'도 깜빡하는 노화와 관련이 있다. 이런 노년의 삶을 담은 글을 읽을 때마다 매번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된다. 늙는다는 건 자꾸 고장 나고 멈추려 하는 몸과 전혀 늙지 않는 마음, 그 메울 수 없는 틈이 슬픈 거라고. 잔 할머니의 일기도 날이 추워질수록 우울해지는데 그 부분이 현실적이면서도 슬펐다. 모든 생명은 태어난 후론 줄곧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 늙지 않는 사람은 없다. 현실에서 예의 없는 노인을 만나면 기분이 상하기도 하지만 모든 노인이 그런 건 아니니 적어도 색안경 끼고 바라보진 말아야겠다. 소소한 일상을 담은 일기 형식의 소설이고 후반부로 갈수록 우울해지는지라 추천은 못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