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03월 독후감

2020. 3. 31. 21:25


01.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 열린책들 / E


예전에 이북으로 사놓은 책인데 체호프 단편인지 몰랐다. 이북 할인할 때 작가도 안 보고 마구잡이로 사들인 건지 뭔지. 민음사에서 나온 <체호프 단편선>을 재밌게 읽은 기억이 있어 기대를 가지고 읽기 시작했는데 전에 읽었던 단편과는 느낌 자체가 달랐다. 민음사에서 재밌고 쉬운 단편만 모아서 책을 만든 건지 모르겠지만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은 대부분 난해하고 어려웠다. 그 난해함과 어려움엔 열린책들의 딱딱하고 건조한 번역도 한몫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잘 읽히는 책은 아니었지만, 체호프의 인간에 대한 관찰력과 통찰력은 여전히 뛰어났다. 표제로 쓰인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은 휴양지에서 만난 남녀의 불륜 이야기였는데 불륜 따위에 흥미를 못 느끼는 나는 읽는 내내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건데' 싶었다. 여러 인간군상을 만날 수 있었던 「6호 병동」이 제일 좋았고, 짧지만 강렬한 <자고 싶다>도 기억에 남는다.

"(전략) 인생은 지긋지긋한 덫입니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 성숙하게 인식할 수 있게 되면, 자신이 출구 없는 덫에 걸려들었다는 것을 저절로 알게 됩니다. 사실, 그는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어떤 우연에 의해서 무(無)에서 이 세상으로 불려 나온 것입니다…. 왜? 그는 자기 존재의 의의와 목적을 알고 싶어 하지만, 누구도 그에게 말해 주지 않고 혹시 말해 준다 하더라도 그저 무의미할 따름입니다. 그가 두드려도 문은 열리지 않고, 죽음만 찾아 옵니다. 그것도 역시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말입니다. 이렇게 감옥과 같은 곳에서 똑같은 불행으로 엮인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산다면 좀 나은 것처럼, 인생에 있어서도 분석과 종합을 즐기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살면서 자유롭게 고매한 사상들을 교환하며 시간을 보낸다면 덫에 걸린 것을 신경 쓰지 않게 될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지성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즐거움입니다."



02.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김초엽 / 허블 / E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면 항상 상위권에 랭크 되어 있어 궁금했던 책인데 드디어 읽어봤다. 첫 번째 단편을 읽은 후 왜 사람들이 이 책을 좋아하는지 그 이유가 짐작됐다. SF라는 장르 때문에 첫인상이 낯설 뿐, 그 안에 담긴 내용물은 그 어떤 소설보다 서정적이고 인간적이었다. 지구가 아닌 우주가 생활 반경이 되어버린 먼 미래에 사는 인류의 인생극장을 보는 듯한 글이었고, 슬프고 아련한 '결'을 위해 '기승전'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편 모두 마음에 들었지만, 행성에 불시착한 인간이 그곳에 사는 외계 생명체와 조우하는 「스펙트럼」이 제일 좋았고, 「관내분실」은 새로운 개념의 미래 장례 문화와 그곳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여성 서사가 인상적이었다. 예전에 어떤 외국 작가의 글을 읽고 'SF 소설도 아름다울 수 있구나'라고 생각했었는데 국내 여성 작가 데뷔작을 읽고 같은 감정을 느끼다니, 새롭고 신선하고 기분 좋은 일이다.

"예전에는 헤어진다는 것이 이런 의미가 아니었어. 적어도 그때는 같은 하늘 아래 있었지. 같은 행성 위에서, 같은 대기를 공유했단 말일세. 하지만 지금은 심지어 같은 우주조차 아니야. 내 사연을 아는 사람들은 내게 수십 년 동안 찾아와 위로의 말을 건넸다네. 그래도 당신들은 같은 우주 안에 있는 것이라고. 그 사실을 위안으로 삼으라고. 하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게 아닌가."



03. 토우의 집 / 권여선 / 자음과모음 / E

삼벌레고개 우물집 주인네 아들 '은철'과 그곳에 세 들어 사는 새댁네 둘째 딸 '원' 이를 중심으로 삼벌레고개 마을 사람들의 시시콜콜 사는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소설이다. 이 소설은 등장인물의 이름부터 심상치가 않다. 주인집 아들은 둘인데 첫째가 '금철' 둘째가 '은철' 합쳐서 '금은' 이고, 새댁네 딸은 셋인데 첫째는 '영' 둘째는 '원' 셋째는 '희'다. 셋이 합쳐 '영원히'. 여기서 주의할 것은 셋째는 사람이 아닌 그 무엇이라는 것. 왜 셋째 딸이 사람이 아닌지는 비밀! 책에서 확인하시라. 솔직히 아무 기대 없이 읽은 책인데 몇 장 읽고 나서 이건 중고라도 구해서 종이책으로 읽었어야 했다는 뒤늦은 후회를 했다. 종이책은 품절이라 이북으로 산 건데 이미 읽었으니 나중에라도 품절이 풀리거나 재출간을 한다면 종이책을 사둬야겠다.

이 소설엔 번역서나 일반 소설에선 만날 수 없는 맛깔나는 우리네 문장이 가득하다. 소설 초반 분위기는 예전에 유행했던 '코믹 가족 시트콤' 그 자체였다. 등장인물들이 일상적인 상황에서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왜 그리 웃기던지. 옷이 예쁘다는 말도 '잡채 때깔처럼 알록달록 곱다'고 하니 그 표현 한 번 투박하지만 알기 쉽고 정겹고 재밌다. 이야기 배경이 오래전이다 보니 지금은 쓰지 않는 낯선 단어들이 많아서 단어를 찾아보며 읽어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즐거운 시간이었다. 전에 읽은 <안녕 주정뱅이>는 취향이 아니었는데 이 책은 이리 좋으니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나. 저자의 책을 몇 권 더 읽어보고 판단해야겠다.

삼벌레고개 중턱에서는 애들을 격일제로 두들겨 패지 않고 남편을 몹시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충분히 새댁스러울 수 있었다. 세상에 그런 어이없는 참을성과 별난 열정을 짧은 새댁 시절 말고 누가 계속 지니고 있을 수 있겠는가.

"왜? 큰형님 말씀이 이 블라우스가 잡채 때깔처럼 알록달록 곱다던데."



04. 아무튼, 비건 / 김한민 / 위고 / E

세 군데 출판사가 함께 만드는 아무튼 시리즈는 '나에게 기쁨이자 즐거움이 되는 생각만 해도 좋은 한 가지를 담은 에세이' 시리즈이다. YES24 북클럽에 무료 가입을 한 김에 빌려 읽어보았다. 현재까지 출간된 시리즈가 꽤 많은데 처음으로 선택한 건 <아무튼, 비건> 비건에 관심이 있는 건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비건을 제일 먼저 읽게 됐다. 비건은 무엇인가? 책을 읽기 전까지 내가 알고 있던 비건은 기본적으로 채식주의자이며, 그 안에서도 허용하는 재료에 따라 몇 가지로 구분된다는 것 정도였다. 책에서 정의한 비건은 육류는 물론 동물로 만든 모든 제품의 소비를 거부하며, 동물로부터 파생되는 제품 또한 거부하고, 동물을 착취하는 모든 상품까지 거부하는 것이었다. 채소만 먹는 것을 비건이라고 생각하는 건 너무 일차원적인 생각이었다. 책의 부제처럼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연결되어 있다. 지구 생명체 중에서 가장 많은 환경오염을 초래하고 있는 인간이 비건이 된다면 동물과 환경, 그전에 인류를 지키게 될 테지만 앞으로도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조만간 자연을 망가트린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것이다. 모든 문제의 원흉은 나와 당신, 인간이다.

타자화란 뭘까? 나와 남, 우리와 남을 가르는 행위다. 내가 동일시하고 공감하는 우리와, 내가 멀리하고 싶은 남을 구분한 후, 남을 우리의 울타리 밖으로 밀어내는 행위다. 그다음엔 담장을 한층 더 높이 친다. 그때부터 남의 일은 나와 무관해진다.

비건이란 단순 채식주의자가 아니다. 비건은 동물로 만든 제품의 소비를 거부하는 사람이자 소비자운동이다. 고기는 물론, 치즈나 우유 같은 유제품, 달걀, 생선도 먹지 않으며, 음식 이외에도 가죽, 모피, 양모, 악어가죽, 상아 같은 제품도 사지 않는다. 좀 더 엄격하게는 꿀처럼 직접적인 동물성 제품은 아니지만 동물을 착취해서 얻은 제품도 거부하며, 같은 의미에서 돌고래 쇼 같은 착취 상품도 거부한다. 하지만 이중에서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게 음식이니, 엄격한 채식이라고 알고 있어도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05. 아무튼, 스릴러 / 이다혜 / 코난북스 / E

나는 스릴러를 좋아한다. 추리, 미스터리, 서스펜스, 호러도 좋아한다. 하지만 이 장르들 뒤에 무조건 픽션이 붙어야 하며 이야기의 배경은 낯설수록 좋다. 영화 <추격자>처럼 실제 있었던 사건을 모티브로 만든 현실적인 작품은 되도록 피한다. 현실적인 상황에 공포를 느끼기도 하고, 실제 사건을 단순히 흥미나 재미로 소비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크다. 각설하고, 이 책은 나처럼 스릴러를 좋아하는 이다혜 영화 기자가 쓴 스릴러 장르에 관한 이야기이다. 어떤 계기로 스릴러를 좋아하게 됐는지부터 시작하여 픽션에서 논픽션에 이르기까지 여러 작품을 언급하며 스릴러에 대한 지식을 뽐낸다. 요즘엔 일본 작가 책은 거의 안 읽지만, 예전에 한참 일본 스릴러와 미스터리에 빠져 있었을 때 읽었던 소설의 대부분이 불쾌하고 찝찝했었는데 그런 작품들을 이 책에서 '이야미스 (싫은 미스터리)'라고 표현하는 걸 읽고 것참 적절한 표현이다 싶었다. 싫지만 내용은 궁금해서 계속 읽게 된다는 건데 그때나 지금이나 내 취향은 아니다.

본문에 언급된 작품 목록은 뒤쪽에 정리되어 있으니 보고 싶은 작품은 체크해뒀다가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나는 논픽션 마이클 길모어의 <내 심장을 향해 쏴라>를 주문해놓은 상태다. <나는 가해자의 어머니입니다>처럼 가해자 가족이 쓴 책인데 분명 읽기 괴롭겠지만 그래도 읽어보고 싶어졌다. 다 읽고 나면 나에게 어떤 생각과 감정이 남을지 궁금해지는 책이다.

그래서 범죄물을 읽는다. 이해할 수 없는 악의의 정체가 궁금해서, 불가능해 보이는 범죄가 이루어지고 또 그것을 해결하는 천재적인 두뇌플레이를 보고 싶어서, 그 안에서는 언제나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 서사 안에서 안전한 쾌락을 느끼고 싶어서, 하지만 '내가 파는 장르'가 무엇을 소비하는지 알고는 있어야 한다. 부디 바라건대, 이 글을 쓰는 나나 읽는 여러분의 삶이 평온하기를. 그리고 이 세상도. 약간은 평온해지기를. 인간들이 서로 때리거나 죽이지 않아도, 환경오염 덕에 조만간 다 함께 망할 듯 하니 더더욱. 어쩐지 결론이 토정비결 점괘같이 되고 말았지만 우리가 아무리 서로의 안녕을 있는 힘껏 빌어주어도, 일간지 사회면에서는 범죄가 넘쳐나리라. 잊지 말아야 하는 한 가지. 사건 뒤에 사람 있어요.



06. 구월의 살인 / 김별아 / 해냄 / E

북클럽에서 읽을 책을 찾아 헤매다 예전에 저자의 <미실>을 재밌게 읽은 기억이 있어 골라 본 책이다. 효종 즉위년(1649년) 음력 10월, 도성 한복판에서 지방의 토호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소설은 그 살인에 얽힌 이야기이다. 중요 인물을 간략히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노비로 태어나 노비를 사랑했고 사랑하는 이를 잃은 후 복수만을 위해 사는 '구월', 과거에 여러 번 낙제한 후 낙하산으로 겨우겨우 형조의 좌랑이 된 검안사 '전방유', 탐욕으로 똘똘 뭉친 인간 각다귀 '김태길', 계의 수장인 '노장', 노장의 오른팔이자 계의 일원인 '윤 선달'. 처음엔 구월이 어떤 사연으로 복수만을 꿈꾸는 인간이 되었는지가 궁금했고, 결말에 다다를수록 고통으로만 점철된 구월의 삶이 시리도록 아팠다. 3대를 이어지는 운명은 어찌나 잔인한지. 거지 같은 신분제만 없었어도 그들은 조금 더 나은 삶을 살았을 텐데. 모든 건 이기적이고 아둔하며 미개한 인간 탓이다.

어려운 단어가 많아 초반엔 쉽게 읽히지 않았는데 읽을수록 그 점이 오히려 매력이 되었다. 얼마나 연구하고 공부해야 이렇게 생소한 단어들로 책 한 권을 채울 수 있는 건지 신기하기까지 하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 실린 짧은 글을 읽고 아이디어를 얻어 써 내려간 소설이라는데 371년 전 실존했던 구월이 살아 돌아 온 듯한 생생함이 느껴졌다. 미실 이후 책을 많이 내셨던데 하나씩 찾아 읽어봐야겠다.

복수는 양날의 검이니 한쪽은 상대를 베고 다른 한쪽은 휘두른 당자를 베기 마련이다. 허나 두렵지 않았다. 이미 한번 죽었으니 다시 죽어도 아쉬울 게 없다. 뜨겁고, 독하고, 맑은. 좋은 술의 조건이 그들의 맹세와 같았다. 분노로 뜨겁고, 원한으로 독하고, 망아(忘我)의 단심으로 맑은. 조금조금 늦봄의 밤이 깊어가고 가만가만 두 늙은이가 취해가고 있었다.



07. 오늘 뭐 먹지? / 권여선 / 한겨레출판 / E

북클럽에 권여선 작가의 책이 하나 더 있어 읽어보았다. 제목에서 미루어 짐작되듯 작가가 좋아하는 음식(이라 쓰고 술안주라 읽는다)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 에피소드와 함께 잘 버무린 맛난 에세이집이다. <안녕 주정뱅이>에서 예상은 했지만 작가는 술을 매우 사랑하는 애주가였고, 책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음식은 반찬과 술안주 두 가지 기능을 하고 있다. 성인이 된 후 뒤늦게 미식에 세계를 접한 작가는 한번 물꼬가 트이자 거침없는 속도로 온갖 먹거리를 탐닉한다. 소주를 좋아해서인지 대부분의 음식이 한식이었는데 이점은 내 입맛과 동일했다. 하지만 제철에 미리 재료를 구해 손질하여 저장해놓고 먹는 부지런함은 나에겐 없는 것이었다.

난 기본적으로 한식을 좋아하고 면보다 밥을 좋아하는 밥순이에 채소 반찬을 좋아한다. 기름기 적고 담백한 음식이면 뭐든 잘 먹는다. 작가처럼 땡초 마니아 정도까진 아니지만 매운 음식도 좋아한다. 남들 다 먹는데 나는 안 먹는 음식이 있다면 술과 곱창, 간장게장이 대표적인데 술은 몸에서 안 받을뿐더러 맛도 없고 곱창과 간장게장은 특유의 냄새와 비린 맛이 싫다. 먹긴 먹지만 되도록 피하는 메뉴는 돈가스와 중화요리다. 이 두 가지는 회사에서 배달을 자주 시켜 먹어 질려서 안 먹게 됐다. 뭐든 적당히 먹어야 한다. 요즘엔 외국에 나가지 않아도 국내에서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음식을 즐길 수 있지만 내 입맛엔 한식이 최고다. 독후감이 갑분 한식 찬양으로 흘러가고 있는데 어쨌든 작가의 이번 책은 포근하고 따뜻한 집밥 같아서 좋았다. 에세이를 이렇게 잘 쓰시는데 왜 한 권밖에 안 쓰신 건지. 작가님의 다음 에세이가 나올 때까지 존버해야겠다.

나는 단식 예찬론자는 아니지만 가끔 단식을 하는 게 삶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삶의 급류에 휩쓸려 가다보면 갑자기 "중지!"를 외치고 싶은 순간이 있다. 휴가 때 사흘이나 나을 정도, 아니, 주말에 하루나 이틀만이라도 시간을 내어 단식을 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숲속의 빈터처럼 고요한 신세계가 열릴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내가 단식을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단식이 끝난 뒤에 꿀물처럼 다디단 미음 물을 먹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다. 간장의 기막힌 간기에 매료되기 위해서, 죽과 젓갈의 새로운 조합을 맛보기 위해서가 아닐까. 단식이 짧은 죽음이라면, 단식후에 먹는 죽과 젓갈은 단연코 부활의 음식이다.



08. 종이달 / 가쿠타 미쓰요 / 위즈덤하우스 / E

회사원 남편과 결혼해 무미건조한 일상을 보내던 우메자와 리카는 친구의 소개로 은행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남편은 항상 자신을 잘난 사람으로 포장하고, 새롭게 일을 시작한 리카를 무시한다. 일에 재미를 느껴 열심히 하다 보니 은행에서도 인정받아 시간제 계약사원이 된 리카는 돈 많고 외로운 부유한 노인층 고객에게 신뢰를 얻게 된다. 이야기가 여기서 끝났다면 전업주부의 재취업 성공기가 됐겠지만 히라바야시 고타라는 젊은 남자와의 만남 이후 리카의 인생은 급변화를 맞는다. 우메자와 리카는 가난한 고학생 히라바야시 고타를 위해 고객의 돈에 손을 대기 시작한다. 시작이 어려웠지 한번 손을 대자 그다음은 쉬웠다. 현실을 외면하고 횡령을 계속하던 리카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횡령 금액이 커지자 외국으로 도주한다. 하지만 외국으로 달아난다 한들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어디에 있든 차가운 현실의 벽은 사라지지 않는다.

저자는 우메자와 리카와 그의 주변인들을 통해 겉으론 평범해보이지만 저마다 병들어 있는 현대인의 일면을 담담히 그려낸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돈의 유무에 따라 삶의 질이 천차만별로 달라지기에 인간에게 돈은 중요하다. 매우 중요하지만, 전부가 되는 것은 위험하다. 전부가 되는 순간, 인간 위에 돈이 놓이는 순간, 인간은 자아를 잃고 돈에 먹혀 파멸로 치닫는다. 소설 속 우메자와 리카가 그러했고 현실 속 수많은 사람이 그러했다. 그들처럼 되지 않기 위해선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런 생각을 하게 해준 소설이었다. 작년에 읽은 책인데 독후감을 안 써서 뒤늦게 올린다.

웨지우드가 아닌 생긴 게 제각각인 접시에 소고기 감자조림, 볼락조림, 감자 샐러드 등을 담으면서, 리카는 무의식적으로 알아차려줘, 하고 중얼거리다 얼굴을 들었다. 내가 지금 뭐라고 했지? 알아차려줘. 그래. 누군가가 내가 하는 일 좀 알아차려줘. 리카는 손을 멈추고 되풀이했다. 부탁이야, 알아차려줘.



09. 사이드 트랙 / 헨닝 망켈 / 웅진지식하우스 / E

북유럽 스릴러 대표 작가 헨닝 망켈의 '형사 쿠르트 발란데르 시리즈' 다섯 번째 이야기다. 발란데르 시리즈는 총 10권이 출간됐는데 그중에서도 제일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이 이 작품이라고 한다. 아쉽게도 작가는 2015년 타계했다.

여름휴가를 몇 주 앞둔 어느 날, 자기네 유채밭에서 어떤 여자가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다며 확인해달라는 전화가 걸려온다. 바쁜 동료 대신 현장으로 출동한 발란데르가 보게 된 것은 끝없이 펼쳐진 노란 유채밭에서 스스로 휘발유를 뒤집어쓰고 분신자살 하는 소녀의 모습이었다. 며칠 후 전 법무부 장관이 살해 당하는 사건이 터지면서 소녀의 사건은 잊히는 듯 하지만 살인범을 쫓는 내내 불타던 소녀의 모습은 발란데르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이후 도끼로 살인한 후 전리품으로 머리 가죽을 벗겨가는 잔인한 수법의 살인이 연달아 발생하고, 발란데르와 팀원들은 연쇄살인범을 잡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발란데르와 범인, 두 사람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에 독자는 발란데르보다 먼저 범인을 알게 된다. 범인의 정체는 쉽게 밝혀지지만 범행 동기는 발란데르의 수사를 차근차근 따라가야만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 또한, 범인의 살인 계획을 독자에게 미리 알려줌으로써 새로운 긴장감을 부여한다. 소녀의 분실자살을 시작으로 계속되는 연쇄살인, 가족과 연인의 문제까지 겹쳐 발란데르는 안팎으로 고통받는다.

소설을 읽으면서 이렇게 고통받는 중년 형사 이야기를 어디서 분명 본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영드 <월랜더>였다. 옮긴이의 말을 읽기 전까지도 그냥 비슷한 이야긴가 싶었는데 네, 드라마 월랜더의 원작 소설이었습니다. 다른 시리즈도 드라마화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시즌4까지 나왔으니 모두 드라마화됐을 듯) 이 소설은 시즌1-1화의 내용이었다. 내용은 한없이 우울한데 영상은 한없이 아름다워서 좋아했던 드라마였는데, 오래전에 봐서 내용을 다 잊어버린 모양이다. 드라마에 원작 소설이 있는 것도 몰랐고, 스웨덴과 영국 두 나라의 발음 차이로 발란데르가 월랜더가 되다니! 이름이 완전 딴판이라 같은 인물이라고 생각도 못했다. 생각난 김에 드라마를 다시 봤는데 각색을 많이 하긴 했지만 똑같은 내용이었다. 드라마도 잘 만들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소설을 읽고 난 후 보니 소설의 압승이다.

화려한 범죄 스릴러가 아닌, 등장인물의 심리 표현에 집중된 세밀화 같은 소설이라 호불호가 갈릴 듯 싶다.

스웨덴은 물질적인 면에서는 가난에서 벗어났고, 대부분은 스스로의 힘으로 그렇게 할 수 있었다. 발란데르가 어릴 때만 해도 답이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들이 - 비록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 여전히 남아 있었다. 하지만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다른 종류의 가난이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지금 진보가 잠시 멈칫하고 복지 국가의 명성이 서서히 깎이고 있는 시점에, 그동안 잠잠했던 정신적 가난이 표면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비에른 프레드만 한 명의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가 비에른 프레드만 같은 사람들이 편안함을 느낄 수 없는 사회를 만들어버린 거라고, 발란데르는 생각했다. 가족들이 똘똘 뭉쳐 있던 오래된 사회를 해체하면서, 가족을 대신할 무언가를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그 결과로 나온 커다란 외로움은 우리가 치러야만 했던 예상하지 못했던 대가였다. 어쩌면 우리가 그걸 무시하기로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10. 우아하게 랍스터를 먹는 법 / 애슐리 브롬 / 이덴슬리벨 / E

낯선 음식을 먹는 방법과 식사 자리에서 지켜야 하는 에티켓 등을 알려주는 책인데 서양인 식생활 기준이어서 특별히 도움이 되는 내용은 아니었다. 생각해보니 같은 문화권의 독자가 읽는다고 해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 너무나 기초적이며 기본적인 정보의 나열이었을 뿐 미식 전문가다운 면모는 느껴지지 않았다. 서양 음식들이 주로 나오고 간혹 동양 음식이 나오는데 대부분 일본 음식이었다. 일본이 아시아의 모든 것인 양 대표인 양 생각하는 양인, 여기 또 한 명 추가요! 중간중간 나오는 유명인들의 음식에 대한 글귀를 제외하고 저자가 쓴 글 중엔 음주운전 하지 말라는 부분이 제일 유익했다. 제목과 표지 일러스트가 마음에 들어서 읽어 본 책이었는데 일러스트가 예쁘다는 것만 기억에 남는다.

"어리석은 자들은 연회를 열고, 현명한 자들은 먹는다." - 벤저민 프랭클린
"인류가 더 건강하게 지구에 더 오래 생존하려면 채식주의 혁명을 이뤄야 한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11. 나이팅게일 / 크리스틴 한나 / 인빅투스

2차 세계대전 발발 후 프랑스, 나이팅게일이란 뜻을 가진 로시뇰 집안의 두 자매 비안느와 이사벨의 전쟁과 함께한 삶을 조명한 소설이다. 자매는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전쟁 참전 후 돌아온 아버지는 피폐한 정신 때문에 자매를 돌보지 못하고 아는 집에 맡겨버린다. 이에 상처받은 언니 비안느는 하루빨리 결혼하여 안정적인 가족을 만들고 싶어 했고, 동생 이사벨은 독립적인 성격에 자유롭길 원하며 무언가를 성취하길 바랐다. 비안느는 바람대로 일찍 결혼하여 딸 소피를 낳고 행복을 누리지만 전쟁은 남편 앙투안을 전장으로 빼앗아간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나치 장교 벡을 채워 넣는다. 기숙 학교에서 또 쫓겨나 비안느와 함께 살 게 된 이사벨은 나치에게 대놓고 반감을 드러내어 비안느의 피를 말린다. 자매의 갈등이 극에 달할 즈음 이사벨은 언니에게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고 아버지가 있는 파리로 향한다. 나이팅게일의 날갯짓이 시작된 것이다.

두 자매의 삶 속엔 전쟁도 있었지만, 그 이전에 사랑이 있고 우정이 있고 가족애와 동료애가 있었다. 분명 전쟁은 비극이지만 그 비극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자매의 다양한 모습을 입체적으로 보여줘서 좋았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작년에 읽었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가 떠올랐다.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전쟁에서의 여성, 그 잊힌 영웅들을 발견하게 된 책이었는데 그들의 모습과 소설 속 자매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꼭 전장에서 총, 칼을 들고 싸워야만 영웅인 것도 아니며, 성별 또한 의미없다. 자매는 자신의 생명을 걸고 많은 생명을 구했고 그 숭고한 행위는 존경받아 마땅하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다소 작위적이었지만) 꼭 필요한 장면이었단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전쟁으로 희생된 수많은 영혼의 평온을 빈다.

"남자들은 이야기를 떠벌리지." 내가 말한다. 이게 그의 질문에 대한 가장 진실하고 간결한 대답이다. 나는 이어서 설명한다. "여자들은 그걸 안고 견디고. 우리에게 그것은 그림자 전쟁이었어. 전쟁이 끝났을 때 여자들에게는 퍼레이드나 훈장 같은 건 없었다. 역사책에 언급되지도 않았고. 우리는 전쟁 중에 해야 될 일을 했고, 전쟁이 끝나자 남은 것들을 모아서 다시 삶을 꾸리기 시작했지. 네 누나도 나만큼 전쟁을 간절히 잊고 싶어 했단다. 어쩌면 그게 내가 저지른 또 하나의 실수였지 - 소피가 잊게 내버려둔 것이. 어쩌면 우린 그 이야기를 했어야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