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e북 말고 새로운 종이책을 미친 듯이 읽고 싶을 때가 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집에 있는 책이 아닌 새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집에 널린 게 안 읽은 책이지만 그것들은 읽기 싫다. 이미 잡아 놓은 책엔 흥미를 잃은 변덕스러운 독자다. 이번에 새로 낚은 책은 '가녀장의 시대'와 '모스크바의 신사'. 가부장도 아니고 가모장도 아닌 가녀장의 시대는 무엇인가 하는 궁금증과 작가의 첫 장편소설이라는 타이틀에 혹했다.


이야기의 무대는 각자의 능력과 자유를 존중하는 ‘낮잠 출판사’이다. 사명은 낮잠 자는 걸 좋아하는 대표가 지었다. 등장인물은 대표이자 가족 모두를 먹여 살리고 있는 가녀장(딸) 슬아, 사무 업무 및 식사 담당을 맡고 있는 직원 복희(모), 청소 및 운전 기타 잡무 담당 웅이(부), 고양이 자매 남희와 숙희까지 모두 다섯이다. 이들의 역할 분담은 명확하며, 공과 사의 구분 또한 명확하고 그에 따른 대가 또한 명확하다.


직원 및 손님 식사를 담당하는 복희의 경우 된장을 만들 때나 김장할 때 따로 보너스를 받는다. 가녀장 슬아는 복희의 노동에 언제나 합당한 대가를 치른다. 집안일은 일이 아니라며 평생을 무시당했던 우리네 어머니가 낮잠 출판사에선 제대로 된 노동의 대가를 받는다. 나는 그것이 못내 흐뭇했다. 모르는 거 빼고 다 아는 웅이는 대표를 편히 모시는 운전기사이며 가구도 뚝딱뚝딱 반나절만에 만들어낼 만큼 손재주도 좋다. 바닥은 언제나 부스러기 하나 없이 깨끗하게 유지하며 남희와 숙희 케어까지 해내는 만능일꾼이다. 슬아, 복희, 웅이는 대부분 환상적인 동료이자 가족이고 가끔은 환장스런 동료이자 가족이다. 그들이 오래도록 낮잠 출판사에서 일하고 먹고 쉬고 잠들길 바란다.


이 소설을 읽고 나니 여성도 자유롭게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물론 여남 소득격차는 여전히 심각하지만) 현시대에 가와 장 사이에 어떤 글자가 들어가든, 아예 들어가지 않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싶다. 소설 속 가족처럼 딸이 주 경제활동을 담당하고 어머니와 아버지가 서포터 역할을 하며 가계를 꾸려갈 수도 있고, 가족 구성원 모두가 각자 경제활동을 할 수도 있고, 각자 상황에 맞는 가계를 꾸리면 될 일이다. 다만, 무임승차하는 일원은 없어야 한다. 다들 자기 몫의 일을 하고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을 때 건강한 가계가 완성될 것이다.


읽는 내내 소설이라기보단 수필을 읽는 기분이었는데 기존에 나온 에세이와 별반 다르지 않은 내용이어서 실망이라는 의견도 곳곳에 보인다. 내가 읽은 작가의 글은 오래전에 읽은 에세이 한 권뿐이라 재탕이라는 느낌 없이 즐겁게 읽긴 했다. 어떤 일이든 처음은 부족할 수 있는 법이니, 작가의 다음 소설을 기대해 본다.


복희는 다시 태평하게 부엌일을 하러 간다. 호르몬보다 더한 무엇이 복희의 전신에 흐르는 듯하다. 그런 힘을 지니고도 그는 어쩐지 가모장 같은 것을 꿈꾸지 않는다. 가부장이든 가녀장이든 아무나 했으면 좋겠다. 월급만 잘 챙겨준다면 가장이 집안에서 어떤 잘난 척을 하든 상관없다. 남이 훼손할 수 없는 기쁨과 자유가 자신에게 있음을 복희는 안다.  - p.142